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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기고] 교통사고 지수가 그 사회의 수준인 이유(19.3.4.)

교통사고 지수가 그 사회의 수준인 이유

김 현 미(국토교통부 장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인상적인 장면 하나.
연쇄 살인이 이어지던 긴박한 상황 속에서 관할 경찰서 강력반은 지원 인력을 요청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모조리 동원되어 남은 인력은 없었다. 범인을 너무나 잡고 싶었으나 잡을 수 없었던 야만의 시대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국민 생명에 대한 대우는 그 사회의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변두리 농촌 여성들을 챙길 여력이 없던 무능의 시대를 굳이 소환해 반추하는 이유다.

교통사고로 인한 단 한 명의 사망자, 부상자도 없도록 하겠다는 스웨덴 정부는 ‘비전 제로(Vision Zero)’ 정책을 실천하면서 전 세계 교통안전의 교과서가 됐다. 그러나 2018년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다시 증가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제기됐지만 스웨덴 정부가 난민 이슈에 더 신경을 쓰게 되면서 교통안전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는 보고에 무게가 실린다. 반대로 치안 상황이 개선되면서 교통안전에 신경을 쓰게 된 뉴욕시의 사례도 있다.

교통사고 지수는 그 사회의 수준이다.

우리나라 2017년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4,185명이었다. 하루 평균 11명이 넘는 국민이 동시다발적으로 비명횡사했다. 이에 정부는 ‘2022년까지 교통사고 사망자 수 절반 줄이기’라는 목표를 세우고 관계부처가 힘을 모아 ‘교통안전 종합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민 생명을 존중하고 지키기 위한 범국가적인 프로젝트다.

이번 대책에는 기존 정부의 계획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정책을 입안하고 도로 등 인프라를 만드는 정부가 책임의 주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비용의 문제로 미뤄졌던 첨단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는 운전자와 보행자가 조심하지 않아서 사고가 생긴다는 계도적 사고에서, 정부의 책임 아래 구조적으로 사망자 발생을 예방하자는, 패러다임의 혁신적인 전환이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대형사고의 주원인인 버스와 화물차에 자동제동 및 차로이탈경고 등 첨단안전장치를 장착하고, 정책적으로 노선버스의 과다한 근로시간을 제한해 대형차량의 사고 방지에 노력했다. 음주운전 처벌기준 강화, 전 좌석 안전띠 의무화 등 교통법규를 강화하도록 지지해준 국민여론도 큰 힘이 됐다.

그 결과 우리나라도 ‘Vision Zero’ 실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3,781을 기록하며 지난 1976년 이후 42년 만에 3,000명대로 낮아졌다. 가장 많은 교통사고 사망자를 기록한 1991년(13,429명)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감소한 수치다.

올해에는 시속 50㎞로 도심의 제한속도를 낮추는 정책이 법제화되고 시범운영이 확대된다. 또 회전교차로, 지그재그 형태 도로, 대각선 횡단보도 등 도로재생(redesign)을 확대해 속도 준수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대형·대중교통 차량의 운행행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알려주는 모바일 운행기록 장치도 도입되고 자동제동장치, 차로이탈경고 장치에 이어, 안전벨트 경고, 음주시동 잠금, 속도보조 장치 등이 연차적으로 의무화된다. 지자체 관리 도로에서 사망사고의 70% 이상이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해 투자재원을 지원하는 등 교통안전 정책이 지속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도로 구조와 차량 중심 문화 속에서 사고는 늘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였고, 반쯤은 체념한 운명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사건사고 대책 마련에서도 늘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며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이 있다. 그래서 ‘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인다’는 슬로건은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발전 앞에서 조금 더 겸허하게 사람을 배려하자는 약속이다. 교통사고 지수가 그 사회의 수준인 진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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