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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공간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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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위치와 영역

국토는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배타적인 영역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여 년에 단군이 아사달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조선의 위치와 영토의 범위에 관한 는 조선후기 실학자들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견해가 대동강중심설, 요동중심설, 중심지이동설이다. 대동강중심설은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보는 것으로 중국 학자들과 우리나라 전통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요동중심설은 오늘날 북한학계의 공식적 입장으로서 실학자들과 신채호, 정인보와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최근 북한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단군릉 발견으로 중심지의 문제가 새로이 정리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심지이동설은 앞의 두 의견을 절충한 것이다. 즉, 고조선이 초기단계에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다가 후기에 대동강 유역의 평양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였다는 입장이다.


이 의견이 현재 남한학계의 주된 경향으로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고조선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고고학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견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은 대동강과 요하 유역 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사서『위략』은 기원전 4세기 말부터 시작된 고조선과 연(燕)의 투쟁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고조선이 2천 리의 땅을 빼앗겼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통해 이미 그 당시에 분명한 영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이 망한 기원전 108년 그 영토에 곧바로 한(漢)의 군(郡) 3개가 설치된 것도 영역통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

삼국시대의 성립과 발전

  • 고구려의 성립과 영토
  • 고구려의 성립
  • 일찍이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옛 고조선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어 한(韓)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압록강 중류일대에서는 훗날 고구려라는 고대 동아시아 강국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압록강 중류지역은 좁은 평야를 중심으로 깊은 계곡과 험한 산이 있는데, 서북쪽으로 혼강을 건너 요동지역에 통하고, 동으로는 독로강을 넘어 개마고원과 동해안으로 통해 동서 교통의 중간지가 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서남쪽으로는 황해로 이어지고, 남쪽은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와 만나고, 북쪽에서는 송화강 유역의 대평원지대나 요하 상류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며 발전해 나갔다.
  • 고구려의 영토 확장
  •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후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소수림왕대에 이루어진 체계적인 통치체제의 정비가 뒷받침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고구려는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영역을 확대해 왔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체제의 정비가 소수림왕을 거치면서 체계적으로 진행되자, 안정된 사회적 힘을 기반으로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는 적극적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광개토왕은 서쪽으로 요동을 차지하고 동북의 전진을 복속시켰고, 남으로는 백제를 쳐서 임진강과 한강 어간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또한, 신라에 들어온 왜의 군대를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치고 신라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강력한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백제와 신라에게 매우 큰 위협이 되었고 이에 대처하고자 하는 백제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나제동맹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장수왕은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강 이남의 경기도 및 충청도 남북부도 일부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6세기 초반까지 이들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고구려의 진출 방향
  • 백제의 성립과 영토
  • 백제의 성립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려 있는 실화의 내용으로 보아 백제를 건국한 중심세력은 북에서 내려온 부여·고구려계의 이주민 집단이었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실은 백제 역사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백제 왕족의 성(姓)이 부여(夫余)씨이고,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유사한 대형무덤이 한강유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점도 그 중 하나이다. 또한, 5세기 중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였으며, 6세기 전반 성왕때에는 일시적으로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기도 하였다.
  • 백제의 영토변화
  • 백제가 처음 건국한 한강유역은 지리적으로 서북과 동북 방면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집단이 거치게 되는 위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 정착한 유이민 집단들을 통합하고 인근 마한의 여러 읍락들을 병탄하면서 집권력 있는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동북과 서북 방면에서 침공해 오는 세력들을 저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의 초기 기록에는 동예나 낙랑군과의 분쟁에 대한 것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백제는 주변국과의 관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성장, 발전, 쇠퇴하였으며 그 과정은 도읍을 기준으로 세 시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백제의 성립

백제의 도읍변경

백제의 도읍변경
  한성시대 관련 지도 웅진시대 관련 지도 사비시대 관련 지도
시기 백제 건국~개로왕 전사 개로왕전사~사비천도 사비천도~백제멸망
도읍 위례성 웅진성(공주부근) 사비성(부여부근)
영토확장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병합 영산강유역까지 지배영역을 확장 낙동강유역의 가야지역까지 확장 서해 해상제해권 고구려에 상실 가야세력 이탈 고구려에 잃었던 한강하류 점령 신라에게 빼앗김 성왕 신라 공격 감행하다 전사 의자왕때 백제멸망
  • 신라의 삼국통일
  • 진흥왕551년 신라는 백제와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다. 처음에는 한강 상류지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몰아냄으로써 한강 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554년 신라의 약속 위반에 격분하여 관산성(管山城:지금의 沃川)으로 쳐들어온 성왕을 죽이고, 백제의 3만 대군을 섬멸시켰다.
  •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얻은 것 외에도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것이었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신라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영토회복을 꿈꾸는 고구려·백제 두 나라로부터 끊임없는 양면 공격을 받게 되어 국가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결을 시도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 660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키고, 668년에는 오랜 전란과 연개소문의 사망 후 내분으로 피폐해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간 협력해 오던 신라와 당의 갈등은 영토 귀속문제로 전면에 표출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고구려 유민을 포섭하여 함께 당나라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현재의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을 차지하여 676년에 불완전하나마 삼국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삼국시대의 성립과 발전

  • 통일신라의 성립과 발전
  • 통일신라의 민족융합책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통일한 이후에 가장 중시한 것은 '삼한일통의식(三韓一統意識)'의 실현이었다. 여기에서 '삼한(三韓)'이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서로 반목 대립하면서도 동족적 유대를 갖고 있는 삼국이 하나로 통일하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삼국통일의 의의와 한계
  • 삼국 통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다음 세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통일을 계기로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형성되어 민족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통일전쟁이 외세인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수행되었다는 점이고, 셋째는, 삼국통일이 불완전하게 이루어짐으로써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상실했다는 점이다.이중 특히 뒤의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삼국통일의 한계성으로 지적되기도 하는데, 심지어는 삼국통일의 의의를 부정하고 고려에 의한 통일이 민족 최초의 통일이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한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한계성은 전자의 경우 당에 대한 거족적 대항으로서 후자의 경우 발해의 건국과 고려의 재통일로 보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 발해의 성립과 영토
  • 발해의 성립
  •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영토의 일부는 신라의 지배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나머지 방대한 영토는 당(唐)나라의 지배 밑에 들어가서 안동도 호부 관할 하에 놓였다. 발해의 건국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698-700년 사이의 일로 추정된다. 건국자는 고구려 왕족의 혈통으로 당나라의 유배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동모산(東牟山) 기슭의 분지를 도읍지로 하여 진(震)나라를 세운 걸걸중상의 장남인 대조영(大祚榮)으로 알려져 있다. 발해의 초기 근거지는 정확히 동모산의 동쪽 기슭으로, 현재의 길림성 돈화현 근처였다. 이곳은 당나라의 군사력이 미치기 힘든 천연의 요새였는데,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719년에는 옛 고구려 땅의 북반부를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시대에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터전이었던 요동지방과, 평양을 포함한 반도 북서부 지방은 지배권에 넣지 못하였다.
발해의 성립과정
  • 발해의 영토확장
  • 발해는 제 1대 왕인 고왕 대조영이 건국을 하고 기틀을 다진 뒤, 2대 무왕 대무예가 왕위에 올라 본격적인 정복활동을 통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무왕(武王)'이라는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재위기간 동안 모든 말갈족을 그의 지배하에 넣으려고 동분서주하였다. 그 결과 발해의 판도는 크게 확장되고 국위도 널리 선양되었다.
  • 그러나 송화강 북쪽에 뿌리를 둔 흑수말갈(黑水靺鞨)만은 끝내 무왕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당나라에게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무왕은 732년 9월에 발해가 군대를 보내서 해로와 육로로 당나라를 침범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중국을 공격한 사례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당나라는 이에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와 대립시키는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을 썼지만, 이 전쟁은 서로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고려의 성립과 영토확장

  • 고려의 성립
  • 고려 태조 왕건은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복지겸(卜知謙) 등의 추대를 받아 철원(鐵圓:鐵原)에서 즉위하여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崇佛政策) 등으로 세력구축에 힘썼다. 이때 한반도 내의 형세는 후삼국(後三國)의 분열기였는데, 935년 신라를 병합하였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 고려의 북진정책
  • 태조가 건국할 당시 고려의 국경은 서쪽으로 대동강(江), 동쪽으로 삭정(朔庭)·정천(井泉)이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청천강(江)과 영흥까지 확대되었는데, 이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대응에서 나온 것이다. 그 뒤 북서지역에 축성이 활발하다가, 성종 12년(993년)에 소손녕(蕭遜寧)의 거란군이 침략하여 고구려 땅을 요구하자 서희(徐熙)가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로 만주도 우리 땅임을 주장하고, 거란과 통교하기 위해 압록강의 여진을 몰아내야 함을 역설하여 강동 6주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 후 거란이 두 차례 더 침략하였으나, 결국 강동 6주는 고려 영토로 인정되었다.이에 거란은 압록강 유역에 내원성(來遠城)·보주성(保州城)을 쌓고 고려와 대치하였으나, 11세기 당시 여진의 위협적인 성장으로 거란과 전쟁을 하게 되고 내원성·보주성이 여진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거란은 이를 고려에 양보하였고, 고려는 두 성을 점령하고 보주성을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삼음으로써 고려 영토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한편, 북동지역은 국경선인 영흥 밖의 함경도에 여진이 살면서 고려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완안부가 남으로 침략하여 이 지역을 소란하게 하자 1107년 윤관이 이를 평정하고 함흥평야 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가 곧 돌려주었다. 이런 사이에 국경선이 차츰 북상하여 공민왕 때는 길주(吉州)·갑산(甲山)까지 넓혀졌다. 또한 실질적으로 국경선이 넓혀진 것은 아니지만 우왕 말년에 추진된 요동정벌도 고려의 마지막 북진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성립과 영토

  • 조선의 성립
  • 14세기 후반 안으로는 정치체제가 쇠퇴와 왕권의 약화,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성계는 여진족·홍건적·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드높이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조준·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다.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에서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건국함으로써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성공하였다.
  • 군 6진과 대마도(對馬島:쓰시마) 정벌
  • 세종은 명나라에 대한 처녀진헌과 금·은의 조공을 바치던 것을 폐지하고 말이나 옷감으로 대신하게 하는 한편, 여진(女眞)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다.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六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으며(1432년),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조선은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의 국경선을 확보하였다.
  •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는 1419년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島主)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를 개항하였다. 그러나 그 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14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계계해조약(癸亥條約) 을 체결하고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 간도 개척과 한민족의 해외이주
  • 간도는 원래 여진족의 거주지로 조선 초기에는 번호(潘胡)라 하였고, 김종서 등이 정벌하여 세정은 이 지역에 6진을 두었다. 청(淸)이 세워진 후 오랫동안 한광지대(閒鑛地帶)로 존속되어 오다가 한국인 유민(流民)이 들어가 미개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고, 숙종 38년(1712)에는 백두산 분수령에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그 후 조·청 사이에 국경분규가 계속되어 오다가 국권침탈 이후 일본이 독단으로 간도의 영토권을 청에 넘겨주었으며, 일제에 항거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간도는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대한제국, 일제침략시대

  • 19세기 후반 조선은 안으로는 무능한 양반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민중세력이,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 세력이 밀려오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쇄국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으나, 결국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른바 보호정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 한일신협약을 체결, 차관정치를 강행하였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영토

  • 간척사업과 국토계획
  •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토면적은 100.188 ㎢이다. 이는 세계 총면적의 0.07%에 해당되며, 세계 200여 국가 중 109위에 속한다.
  •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 시대에 국토 면적의 확장은 이전의 역사와 같이 대외적인 일이 아니라, 간척사업과 같은 대내적인 일에 국한된다. 따라서 그 확대되는 면적 역시 한계가 있다. 특히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는 간척사업을 통해 국토의 면적을 넓혀서 농경지, 공업용지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간척사업이 펼쳐지는 간척지는 주로 만이나 삼각주 지역으로 특히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며, 각종 어류의 산란장이기도 해서 국토의 잠재적 생산력을 상실하는 단점이 있다. 또한 간척사업 후에는 해양생태계의 변화로 인근해역의 생산력이 급격히 저하된다. 이처럼 간척사업은 우리의 자연환경과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토에 대한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의 수립과 집행이 요구되는 것이다.
간척사업과 국토계획
2012년 2011년 2001년 2000년 1999년 1998년 1997년
100.188km² 100.148km² 99.538km² 99.460km² 99.434km² 99.407km² 99.373km²